‘연인’이 인조 왕을 바라보는 시선[서병기 연예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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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7 17:51
‘연인’이 인조 왕을 바라보는 시선[서병기 연예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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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요즘 MBC 금토드라마 ‘연인’은 이장현(남궁민)과 유길채(안은진)의 가슴 시린 사랑을 잘 그려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장현의 명대사 퍼레이드가 이어지고 있다. “오늘 당신 안아도 될까”, “난 무엇이건 길채면 돼”, “안아줘야지 괴로웠을테니…” “미안해, 너무 늦었지.정말 미안해” 등등.
이장현은 조선시대 최고의 사랑꾼이다. 청나라 홍타이지의 딸인 황녀(각화)가 노골적으로 유혹해도 안먹히는 보기드문 일편단심의 아이콘이다. 이렇게 멋있어도 되나 할 정도다. 세속적 출세와 물욕을 벗어난 장현과 길채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현대에도 충분히 유효한 것이기에, 감정을 이입하며 볼 수 있다.
이장현은 나랏님도 외면한 조선포로를 구하기 위해 홀로 나선다. 계산법으로는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여기에는 장현의 아버지 장철(문성근)의 세계관이 전수된 듯하다. 예와 의리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것을 강조하는 유학자 장철은 ‘포로들이 역도로 몰리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임금에게 상소를 통해 “전하, 내수사에 억류된 백성들(포로)을 금군으로 내보내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인조 왕을 보고 있으면 안타깝고 한숨만 나온다. 그동안 인조 시기를 그린 사극과 영화는 수없이 많았지만, 인조 왕에 대해 집요하게 따라가는 드라마는 ‘연인’이 독보적이다.
인조는 실제 역사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왕이다. 매번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연인’이 인조를 바라보는 시선을 요약하면 “책임지지 않음”과 “의심병”이다. 둘을 합치면 “비겁함”이다. 이 비겁함은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며 가지게 된 치욕적 무력감의 콤플렉스를 이해한다 해도 고스란히 남는다.
인조시기 병자호란은 공부할수록 안일어날 수 있는 전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최근 연구성과를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고려대 역사교육과 조영헌 교수도 인조와 상관없이 청이 침략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최근 연구성과를 ‘연인’이 반영했다며,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정묘호란을 통해 조선과 청은 형제 맹약을 맺었는데, 인조가 관리들에게 보낸 ‘절화교서’(‘조선에서 그들(청나라)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니, 용감한 사람들이 종군을 자원해 난국을 헤쳐나가자’는 내용)를 용골대에게 뺏겨 트집이 잡혔다는 것. 청은 조선이 먼저 형제의 맹약을 깼다면서 전쟁 발발 책임을 인조와 조선에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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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에서도 장현이 소현세자(김무준)에게 “저들은 명(明)과의 결전이 다가올수록 후방의 조선을 견제하고, 조선의 병사와 식량을 얻기를 원했으니, 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조선을 침략했을 것입니다”라고 전쟁의 불가피성을 말한다.
그럼에도 당시 청에 맞서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의 주장을 따라 전쟁을 했다면 무슨 대책이 있었어야 했는데, 별다른 대책과 준비가 없었다. 청군 선발대가 압록강에서 6일만에 한양에 도착할 정도의 속공 플레이를 펼친 가운데, 임금과 왕실을 보호하는 근왕병(勤王兵)은 대다수가 남한산성까지 가지도 못한 채, 도륙을 당했다.(김준룡의 광교산 전투 승리 등 일부는 예외)
인조(능양군)는 18살때 얼떨결에 왕이 된 중종(진성대군)과는 한참 다르다. 직접 반정군을 지휘하며 반정에 성공하며 보위에 올랐다. 권력의지가 강하다는 뜻이다. 인조는 28살에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 등 서인(西人)과 함께 광해군과 당시 권력을 잡은 북인들을 몰아냈다.
인조는 보위에 있던 기간중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세차례 변란을 겪으며 궁을 비우기에 바빴다. 이괄의 난때는 공주 공산성,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 병자호란때는 남한산성으로 몽진했다.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조선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보게 한 장본인이다. 수십만명의 포로(피로인, 被擄人)들이 잡혀가 심양에서는 수시로 인간시장이 열렸다. 조선으로 돌아온 여성 피로인들은 몸이 더럽혀졌다며 문전박대를 당하는 등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병자호란중 청나라 진영에는 조선 여자 포로들이 많았고, 그 옆에는 시체들이 쌓였다고 한다. 청 군대가 조선 여성들에게 딸린 아이들을 죽인 후 진영 근처에 유기한 것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사회경제적으로 엄청난 문제를 야기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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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나랏님이라면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멘트’라도 나와야 하겠지만, 인조는 어쩔 수 없었다며 정치를 이어갔다. 그런 마음으로 정치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영국이나 프랑스였다면, 국민 앞에서 큰 일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인조는 책임지지 않았고, 53세에 자연사했다.
인조가 가진 콤플렉스는 불안으로 이어지면서 사람을 의심하는 증세로 확장됐다. 최명길, 심기원 등 한 명씩 때려잡았고, 소현세자, 강빈 등을 의심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거기에 ‘투덜이’ 인조는 건강이 좋지 않아 골골거리고 있다.
‘연인’에서도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못데려온 포로를 데려올 수 있게 해달라고 인조에게 간청했지만, “사병을 키우려고 하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소현세자는 아버지 때문에 스트레스가 생겨 몸져누웠고, 인조가 보낸 어의의 침술을 받은 이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인조의 의심은 소현세자의 아내이자 며느리인 강빈(전혜원)에게까지 뻗쳤다. 결국 강빈도 사사됐다. 우의정을 했던 강빈의 아버지 강석기는 광해군 정치에 반대해 낙향하자 인조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지만, 사망 후 강빈이 사사되면서 관작이 추탈되었다. 강빈의 어머니와 두 형제도 처형되었다.
임금이 먹을 전복에 이물질이 나왔고, 궁안에 흉물을 묻어 웃전을 저주한다는 일에 강빈이 연루됐다는 죄를 쓰게 됐다. 몇몇 신하가 “말이 안된다”고 하자 인조는 “개새끼 같은 것을”이라는 상소리까지 내뱉었다.
뿐만 아니라 인조는 중용하던 대신인 최명길과 심기원도 구실을 만들어 내쳤다. ‘연인’의 황진영 작가가 인조를 바라보는 시선은 19회에 회맹제(임금과 신하들이 짐승의 피를 마시며 단결을 맹세하는 제사)후 인조에게 결국 내팽개져지고 몸져누은 최명길에게 문병 온 김상헌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 전하를 임금으로 세운 일 후회하시는가. 자네가 김자점, 김류와 손잡고 능양군을 보위에 올렸지. 아무도 능양군(인조)이 반정을 꾀할 거라고 생각 못했어. 유순하고 겁이 많았거든. 헌데 이제 보니 우리 임금은 승부사야.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그 누구보다도 기민해졌거든. 그 때의 능양군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네. 지금도 마찬가지지. 우리 임금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어. 살아도 죽는 길이 있고, 죽어도 사는 길이 있지. 우리는 병자년에 오랑캐와 끝까지 싸워야 했네. 그랬다면 전하가 저리 망가지지도 않았을테고.”
이 말을 들은 최명길은 “이 말을 하려고 오셨소”라고 하자, 김상헌은 “무서워서 왔네. 이 나라가 과연 어찌될지 무서워”라고 말한다.
인조는 최명길이 끝끝내 강빈을 비호한 점을 수상하게 여기며 허튼 마음을 품었다며 의심을 했고, 이에 지친 최명길은 62세에 노환으로 숨을 거둔다.
주화파의 대표였던 최명길은 ‘연인’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이런 꼴을 보자고 나라 팔아버린 소인배라는 소리를 들으며 전하를 지킨 게 아니었건만… ”이라며 의미있는 독백을 한다.
병자호란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조를 남기며 청나라에 압송된 척화대신 김상헌도 귀국후 양주 석실에서 노후를 보내며, 늙은 신하를 부담스러워하는 인조를 만나지 못했다.
이렇게 인조는 자신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게 된다. 그럼 무엇으로 정치를 하나?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요즘 MBC 금토드라마 ‘연인’은 이장현(남궁민)과 유길채(안은진)의 가슴 시린 사랑을 잘 그려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장현의 명대사 퍼레이드가 이어지고 있다. “오늘 당신 안아도 될까”, “난 무엇이건 길채면 돼”, “안아줘야지 괴로웠을테니…” “미안해, 너무 늦었지.정말 미안해” 등등.
이장현은 조선시대 최고의 사랑꾼이다. 청나라 홍타이지의 딸인 황녀(각화)가 노골적으로 유혹해도 안먹히는 보기드문 일편단심의 아이콘이다. 이렇게 멋있어도 되나 할 정도다. 세속적 출세와 물욕을 벗어난 장현과 길채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현대에도 충분히 유효한 것이기에, 감정을 이입하며 볼 수 있다.
이장현은 나랏님도 외면한 조선포로를 구하기 위해 홀로 나선다. 계산법으로는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여기에는 장현의 아버지 장철(문성근)의 세계관이 전수된 듯하다. 예와 의리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것을 강조하는 유학자 장철은 ‘포로들이 역도로 몰리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임금에게 상소를 통해 “전하, 내수사에 억류된 백성들(포로)을 금군으로 내보내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인조 왕을 보고 있으면 안타깝고 한숨만 나온다. 그동안 인조 시기를 그린 사극과 영화는 수없이 많았지만, 인조 왕에 대해 집요하게 따라가는 드라마는 ‘연인’이 독보적이다.
인조는 실제 역사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왕이다. 매번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연인’이 인조를 바라보는 시선을 요약하면 “책임지지 않음”과 “의심병”이다. 둘을 합치면 “비겁함”이다. 이 비겁함은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며 가지게 된 치욕적 무력감의 콤플렉스를 이해한다 해도 고스란히 남는다.
인조시기 병자호란은 공부할수록 안일어날 수 있는 전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최근 연구성과를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고려대 역사교육과 조영헌 교수도 인조와 상관없이 청이 침략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최근 연구성과를 ‘연인’이 반영했다며,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정묘호란을 통해 조선과 청은 형제 맹약을 맺었는데, 인조가 관리들에게 보낸 ‘절화교서’(‘조선에서 그들(청나라)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니, 용감한 사람들이 종군을 자원해 난국을 헤쳐나가자’는 내용)를 용골대에게 뺏겨 트집이 잡혔다는 것. 청은 조선이 먼저 형제의 맹약을 깼다면서 전쟁 발발 책임을 인조와 조선에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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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에서도 장현이 소현세자(김무준)에게 “저들은 명(明)과의 결전이 다가올수록 후방의 조선을 견제하고, 조선의 병사와 식량을 얻기를 원했으니, 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조선을 침략했을 것입니다”라고 전쟁의 불가피성을 말한다.
그럼에도 당시 청에 맞서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의 주장을 따라 전쟁을 했다면 무슨 대책이 있었어야 했는데, 별다른 대책과 준비가 없었다. 청군 선발대가 압록강에서 6일만에 한양에 도착할 정도의 속공 플레이를 펼친 가운데, 임금과 왕실을 보호하는 근왕병(勤王兵)은 대다수가 남한산성까지 가지도 못한 채, 도륙을 당했다.(김준룡의 광교산 전투 승리 등 일부는 예외)
인조(능양군)는 18살때 얼떨결에 왕이 된 중종(진성대군)과는 한참 다르다. 직접 반정군을 지휘하며 반정에 성공하며 보위에 올랐다. 권력의지가 강하다는 뜻이다. 인조는 28살에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 등 서인(西人)과 함께 광해군과 당시 권력을 잡은 북인들을 몰아냈다.
인조는 보위에 있던 기간중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세차례 변란을 겪으며 궁을 비우기에 바빴다. 이괄의 난때는 공주 공산성,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 병자호란때는 남한산성으로 몽진했다.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조선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보게 한 장본인이다. 수십만명의 포로(피로인, 被擄人)들이 잡혀가 심양에서는 수시로 인간시장이 열렸다. 조선으로 돌아온 여성 피로인들은 몸이 더럽혀졌다며 문전박대를 당하는 등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병자호란중 청나라 진영에는 조선 여자 포로들이 많았고, 그 옆에는 시체들이 쌓였다고 한다. 청 군대가 조선 여성들에게 딸린 아이들을 죽인 후 진영 근처에 유기한 것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사회경제적으로 엄청난 문제를 야기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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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나랏님이라면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멘트’라도 나와야 하겠지만, 인조는 어쩔 수 없었다며 정치를 이어갔다. 그런 마음으로 정치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영국이나 프랑스였다면, 국민 앞에서 큰 일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인조는 책임지지 않았고, 53세에 자연사했다.
인조가 가진 콤플렉스는 불안으로 이어지면서 사람을 의심하는 증세로 확장됐다. 최명길, 심기원 등 한 명씩 때려잡았고, 소현세자, 강빈 등을 의심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거기에 ‘투덜이’ 인조는 건강이 좋지 않아 골골거리고 있다.
‘연인’에서도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못데려온 포로를 데려올 수 있게 해달라고 인조에게 간청했지만, “사병을 키우려고 하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소현세자는 아버지 때문에 스트레스가 생겨 몸져누웠고, 인조가 보낸 어의의 침술을 받은 이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인조의 의심은 소현세자의 아내이자 며느리인 강빈(전혜원)에게까지 뻗쳤다. 결국 강빈도 사사됐다. 우의정을 했던 강빈의 아버지 강석기는 광해군 정치에 반대해 낙향하자 인조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지만, 사망 후 강빈이 사사되면서 관작이 추탈되었다. 강빈의 어머니와 두 형제도 처형되었다.
임금이 먹을 전복에 이물질이 나왔고, 궁안에 흉물을 묻어 웃전을 저주한다는 일에 강빈이 연루됐다는 죄를 쓰게 됐다. 몇몇 신하가 “말이 안된다”고 하자 인조는 “개새끼 같은 것을”이라는 상소리까지 내뱉었다.
뿐만 아니라 인조는 중용하던 대신인 최명길과 심기원도 구실을 만들어 내쳤다. ‘연인’의 황진영 작가가 인조를 바라보는 시선은 19회에 회맹제(임금과 신하들이 짐승의 피를 마시며 단결을 맹세하는 제사)후 인조에게 결국 내팽개져지고 몸져누은 최명길에게 문병 온 김상헌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 전하를 임금으로 세운 일 후회하시는가. 자네가 김자점, 김류와 손잡고 능양군을 보위에 올렸지. 아무도 능양군(인조)이 반정을 꾀할 거라고 생각 못했어. 유순하고 겁이 많았거든. 헌데 이제 보니 우리 임금은 승부사야.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그 누구보다도 기민해졌거든. 그 때의 능양군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네. 지금도 마찬가지지. 우리 임금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어. 살아도 죽는 길이 있고, 죽어도 사는 길이 있지. 우리는 병자년에 오랑캐와 끝까지 싸워야 했네. 그랬다면 전하가 저리 망가지지도 않았을테고.”
이 말을 들은 최명길은 “이 말을 하려고 오셨소”라고 하자, 김상헌은 “무서워서 왔네. 이 나라가 과연 어찌될지 무서워”라고 말한다.
인조는 최명길이 끝끝내 강빈을 비호한 점을 수상하게 여기며 허튼 마음을 품었다며 의심을 했고, 이에 지친 최명길은 62세에 노환으로 숨을 거둔다.
주화파의 대표였던 최명길은 ‘연인’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이런 꼴을 보자고 나라 팔아버린 소인배라는 소리를 들으며 전하를 지킨 게 아니었건만… ”이라며 의미있는 독백을 한다.
병자호란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조를 남기며 청나라에 압송된 척화대신 김상헌도 귀국후 양주 석실에서 노후를 보내며, 늙은 신하를 부담스러워하는 인조를 만나지 못했다.
이렇게 인조는 자신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게 된다. 그럼 무엇으로 정치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