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그 켈리'가 또 일을 냈다. 위기에 몰린 물오른 타격감의 텍사스 레인저스 타선을 잠재우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귀중한 1승을 안겼다.

애리조나는 29일(한국시간) 미국 텍사스주 알링턴 글로브라이프필드에서 열린 2023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월드시리즈(WS·7전4승제) 2차전에서 텍사스를 9-1로 대파했다.

애리조나는 적진에서 1승 1패 동률을 이룬 뒤 홈으로 향하게 됐다. 3차전부터 5차전까지는 애리조나 홈 체이스필드에서 경기가 열린다. 이날 승리로 홈에서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것까지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전날 연장 11회 끝내기 홈런을 맞고 고개를 숙였던 터라 더욱 소중한 1승이다. 선발 우투수 메릴 켈리(35)가 선봉에 섰다.

켈리는 7이닝 동안 89구를 뿌리며 3피안타(1피홈런) 무사사구 9탈삼진 1실점으로 텍사스 타선을 제압했다.

LA 다저스와 내셔널리그(NL) 디비전 시리즈(NLDS)에서 6⅓이닝 무실점 호투로 팀에 승리를 안긴 켈리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NL 챔피언십 시리즈(NLCS)에선 2경기에 선발 등판해 10⅔이닝을 지켰다. 특히 6차전에서 값진 투구로 1승을 안기며 애리조나의 대역전극 월드시리즈행을 이끌었다.

이날은 이번 가을야구에서 가장 완벽한 투구를 펼쳤다. 이로써 켈리는 가을야구에서 3승 1패 ERA 2.25로 애리조나의 특급 에이스의 면모를 굳혀가고 있다.

타선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었다. 케텔 마르테와 코빈 캐롤, 대타로 나선 엠마누엘 리베라가 2타점씩을 올렸고 토미 팜은 4타수 4안타를 기록하며 팀 타선을 이끌며 2득점에 성공했다. 모레노는 홈런을 날리며 텍사스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놨다.

반면 텍사스는 선발 조던 몽고메리가 6이닝 동안 9피안타 4실점하며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다만 그보다는 타선의 침묵이 뼈아팠다. 이번 가을야구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한 아돌리스 가르시아가 3타수 무안타 1볼넷 1삼진으로 침묵했고 켈리에 꽁꽁 묶이며 팀 안타가 4개에 불과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경기였다.

애리조나는 케텔 마르테(2루수)-코빈 캐롤(우익수)-가브리엘 모레노(포수)-크리스티안 워커(1루수)-토미 팜(지명타자)-루어데스 구리엘 주니어(좌익수)-알렉 토마스(중견수)-에반 롱고리아(3루수)-헤랄도 페르도모(유격수) 순으로 선발 라인업을 구축했다.

텍사스는 마르커스 세미엔(2루수)-코리 시거(유격수)-에반 카터(좌익수)-아돌리스 가르시아(우익수)-미치 가버(지명타자)-요나 하임(포수)-나다니엘 로우(1루수)-조쉬 정(3루수)-레오디 타베라스(중견수)로 맞섰다.

켈리는 한국 야구 팬들에게 친숙한 선수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에서 뛰며 통산 119경기 48승 32패 평균자책점(ERA) 3.86으로 맹활약했다. 특히 2018년엔 SK의 우승을 이끈 선수였다.

'역수출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켈리는 KBO리그 활약을 앞세워 MLB에 진출했고 애리조나와 계약을 맺고 2019년부터 빅리거가 됐다. 첫 시즌부터 13승을 챙긴 켈리는 꾸준히 선발로서 활약하며 연착륙했다. 지난 시즌 13승을 거뒀고 올 시즌에도 12승 8패 ERA 3.29로 애리조나의 선발 로테이션 한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으나 빅리그에서 치르는 가을야구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켈리는 애리조나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한국에서의 가을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처럼 보였다.

올초 미국 스프링캠프에서 스타뉴스와 만난 켈리는 "한국은 내게 큰 의미가 있다. 한국에 간 것은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게 아주 특별하다. 만약 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애리조나 유니폼을 입고 여기에 있지 못했을 것"이라며 "지금 이 자리까지 오기에 긴 여정이었지만, 나에겐 큰 의미가 있다.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며 고마워했다.

앞서서도 팀의 에이스 역할을 맡았으나 이날 투구는 발군이었다. 1회 첫 타자 세미엔을 상대로 삼진아웃으로 시작했다. 유리한 볼 카운트에서 낮게 떨어지는 바깥쪽으로 멀어져가는 슬라이더에 세미엔은 속수무책으로 헛스윙을 했다. 카터에겐 유리한 카운트에서 하단에 걸치는 컷패스트볼(커터)을 던졌다. 카터는 손도 대지 못하고 루킹삼진으로 물러났다.

2회 삼자범퇴로 가볍게 마친 켈리는 3회말에도 삼진 2개를 보탰다. 로우는 바깥쪽에 걸치는 커터에 서서 당했고 타베라스는 3구 삼진으로 물러났다. 결정구는 낮은 체인지업.

4회 타선의 2득점을 업고 투구를 무실점을 이어간 켈리는 5회 이날 유일한 실점을 했다. 선두타자 가버에게 던진 시속 93.3마일(150.2㎞) 몸쪽 낮은 싱커를 통타 당했다. 실투가 아닌 잘 제구된 공이었으나 가버의 기술적 타격에 당했다. 타구는 좌측 담장을 넘는 추격의 솔로 아치가 됐다.

그러나 홈런 이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임을 1루수 땅볼, 로우를 좌익수 뜬공으로 돌려세운 뒤 조쉬 정에게 안타를 맞았으나 타베라스를 투수 땅볼로 돌려세워 이닝을 마무리했다.

긴장되는 경기에서 평소보다 더 많은 힘을 쓰며 체력적으로 부담을 느낄 법도 했지만 켈리는 더 강해졌다. 6회말이 하이라이트였다. 2-1로 살얼음판 리드 속 1번 타자부터 다시 상대했으나 켈리는 거침 없었다. 칼날 제구를 바탕으로 바깥쪽 보더라인에 걸치는 포심패스트볼을 던져 루킹삼진을 잡아냈다. 좌타자 시거에겐 반대쪽 바깥쪽으로 백도어성 커터로 헛스윙 삼진을 유도했다. 다양한 레퍼토리에 텍사스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카터는 홈플레이트 앞으로 큰 낙차를 그리며 떨어지는 커브에 맥없이 방망이를 휘두르며 물러났다.

타선의 추가 2득점 후 7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켈리는 이번 가을야구 최고 스타 가르시아를 상대로도 루킹삼진을 잡아냈다. 5구 몸쪽으로 허를 찌른 커브에 이어 6구로 바깥쪽 보더라인에 걸치는 94.1마일(151.4㎞) 포심을 던지자 가르시아도 허무하게 루킹삼진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임은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한복판으로 향한 싱커에도 손을 뻗지 못하고 삼진아웃됐다. 그만큼 이날 켈리의 투구가 좀처럼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난공불락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켈리의 호투가 이어지던 4회초 애리조나 타선이 힘을 냈다. 1사에서 모레노가 몽고메리의 8구 가운데로 몰리는 싱커를 공략해 중앙 담장을 넘기는 선제 솔로 홈런을 날렸다. 2사에서도 집중력이 빛났다. 팜이 우익수 방면 2루타를 날렸고 구리엘 주니어가 좌전안타를 때려내며 팜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켈리의 연이은 호투에 애리조나 타선은 다시 한 번 힘을 냈다. 2-1로 앞선 7회초 공격에서 토마스가 중견수 방면 2루타를 날렸고 이어 롱고리아가 1타점 좌전 적시타를 날렸다.

결국 6회까지 2실점 호투하던 몽고메리가 강판됐다. 그러나 이후 텍사스 마운드는 더 흔들렸다. 페르도모의 희생번트로 주자를 다시 득점권에 내보낸 애리조나는 2사에서 캐롤의 좌전 적시타로 4-1로 점수 차를 벌렸다.

애리조나 타선은 8회초 댄 더닝 대신 마운드에 오른 크리스 스트래튼도 두들겼다. 선두타자 팜이 안타로 출루했고 구리엘 주니어의 희생번트로 주자를 2루로 보냈다. 텍사스는 다시 한 번 투수를 교체했다. 그러나 마틴 페레스는 2사 2루에서 리베라와 페르도모에게 연속 볼넷을 허용하더니 마르티에게 2타점 중전 적시타를 맞았다. 이어 캐롤도 우익수 앞에 타구를 떨어뜨리는 안타로 주자 한 명을 더 불러들였다.

사실상 승부의 무게추가 애리조나 쪽으로 완전히 기운 8회였다. 애리조나는 켈리를 대신해 앤드류 살프랭크를 투입해 8회말을 세 타자 만에 막아냈다.

9회에도 애리조나 타선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워커와 구리엘 주니어의 안타와 토마스의 유격수 땅볼 때 주자가 2,3루로 향했고 리베라의 좌전 안타 때 주자 2명이 모두 홈을 파고들어 9-1이 됐다.

9회말 텍사스는 세미엔이 안타, 가르시아의 볼넷으로 마지막 기회를 노렸으나 바뀐 투수 루이스 프리아스가 가버를 3루수 직선타로 막아내며 승리에 마침표를 찍었다.